회 상
-0-
"여보? 어서 일어나요."
마누라의 목소리가 내 귀를 사정없이 파고 들어왔다. 휴일이라
서 더 쉬고 싶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누라
의 목소리는 더욱더 큰소리로 내 귀를 찢어 놓고 있었다.
"여보? 밖에 눈이 오잖아요. 어서 일어나서 눈 좀 치워요."
잠에서 덜 깨어난 나는, 눈을 비비다가 아내가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그렇지만 그 곳에는 겨울이라 두꺼
운 커텐이 쳐져 있어서 눈을 볼 수 없었다. 대충 이부자리를 장
롱에 집어넣고 잠에 덜 깬 몸을 비틀거리며 창문을 향해서 걸어
갔다.
-쫘아악-
커텐을 걷어내자. 유리창 밖으로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한 밤중부터 오기 시작했는지 바닥에는 눈이 꽤 높게 싸여있었
고 고드름이 지붕 끝에 매달려 있었다.
하얀색, 온통 하얀색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희뿌연 하늘 사이로 자그마한 눈 알갱이들이 서로 먼저 떨어지
려고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땅바닥에 떨어지면
하나가 될 것을 괜한 수고들을 하고 있었다.
"여보? 뭐해요, 일어났으면 빨리 집 앞에 쌓인 눈 좀 쓸고 들어
와요."
다시 아내의 재촉하는 소리가 들리자. 멍청히 생각에 잠겨 있
던 나는 현실 속으로 거세게 빠져 나오고 있었다.
"어. 알았어. 지금 나가, 나간다고. 젠 장할 여편네 처음 결혼했
을 때는 다소근 하고 좋았는데 가면 갈수록 변해 가는군. 세월
이 원망스러워. 세월이."
-1-
대문을 나섰다. 하얀 눈이 나풀거리며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모습이, 여인이 발레를 하듯, 조용하면서 거룩한 느낌도 들
었다.
작은 눈도 있었고 그 것 보다는 조금 더 큰 눈이, 두툼하게 입
고 나온 내 머리 위에 조금씩 쌓여갔다.
저 멀리 있는 산들은 하얀 눈에 의해서 지배 당한지 오래 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온통 하얀색이었다. 산 중턱에 있는
우리 마을이, 저 멀리 꿈속에서 존재하는 동화 속 나라 같이 환
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쓱쓱 싹싹-
이런 저런 생각을 빗자루로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푹신푹신해
보이던 하얀 눈이 쓸려 나가자. 딱딱하고 단단한, 땅 바닥이 드
러났다. 차라리 그냥 맨땅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현 시대의 과학은, 시골 구석구석 까지 시멘트로 길을 내는 바
람에 아이들에게는, 상막한 환경 속에서 힘들게 살 수 밖에 없
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어서 부모들은 아이들한테서 잠시도 눈을 돌릴 수 없었고 늘
주위를 시키고 다시 상기 시켰다. 맨 땅에서 놀던 예전 아이들
에 비해서 요즘 시대의 아이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쓱쓱 싹싹-
조금씩, 조금씩 쓸어가다가 보니 어느새 우리 집 길 앞까지 다
쓸어 버렸다. 다른 집사람들은 아직도 한 밤중인지 아직도 하얀
눈이 그들 마당 앞에 쌓여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함!"
"어! 안녕하세요."
하품을 하며 나오던 옆집 젊은 아가씨가 나를 보고 인사를 했
다. 살포시 웃는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보아오던 얼굴처럼 느껴
졌다.
"예. 아가씨도 일찍 일어 났네요."
"아뇨. 오늘은 일요일이 라서 늦게 일어 난 거죠. 평일에는 직
장이 서울이라서 더 일찍 일어나요."
"그래요. 하하"
괜히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나는 커다란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집 앞마당을 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가녀린 몸으
로 움직이는 모습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했다.
내 아내도 이런 때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저 편에 보이는 아이
들처럼 놀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 늙어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성격도 세상 풍파에 휩쓸려서
다 낡아빠진 가죽 가방처럼 거칠게 변해 버렸다.
저기서 뛰어 노는 아이들, 자그마한 아이들을 보니 가슴속에서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보이지 않던 존재가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아!"
깊은 한 숨과 함께 머나먼 터널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주
먼 시간 속으로.
-2-
회색 물감으로 칠해 놓은 듯한 하늘에서, 많이 내리던 눈발이
줄어들자.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허름한 집 여러 체가 옹기종기 모여서 자그마한 마을을 만들고
그 주위에는 논이 둘러싸고 있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덥고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까지도 하얀 색으로 물들게 만들었다.
"야! 눈이다 눈이 온다."
한 남자아이가 소리를 질러대자. 여러 명의 아이들이 같이 소
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하늘로 울려 퍼져서 사라져
갔다.
"우리 눈사람 만들자."
"아냐. 내가 텔레비를 보니까. 그 속에 아름다운 얼음 궁전이
있었는데 멋있더라. 우리 눈으로 얼음 궁전을 만들자. 눈으로 지
어진 얼음 궁전, 어때 멋있겠지."
작은 남자아이가 그럴싸하게 말을 하자. 모두들 신이 나서 커
다란 함성과 함께 집을 지어가기 시작했다.
눈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눈 집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위로.
논 위에 놀고 있는 아이들 뒤편으로 어른들은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이마에 땀이 베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편에서 한 여자아이와 옆에는 남동생으로 보이는 작은아이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눈은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
었고 그 아이들이 지나온 발자국은 금새 사라져 버리고 아무도
다니지 않던 길처럼 감추어 버렸다.
아이들은 짓던 눈 집이 점차 커져서 성처럼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그런데 저편에서 혼자 얼음궁전을 짓고 있던 남
자아이의 집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야! 은태야. 그게 뭐냐? 에이 내 집을 좀 봐라. 내 집 좀."
한 아이가 놀리고 있었다.
"뭐! 너는 뭐가, 얼마나 더 잘 지어서 그러냐."
씩씩대면서 단단한 눈 뭉치를 던졌다. 그러자 그 눈 뭉치는 눈
집 벽에 가서 박혔다.
"이야. 은태야. 정말 고맙다. 덕분에 집이 더 단단해 졌어."
그렇게 약올리며 눈 뭉치 하나를 던지자. 은태의 집 일부분이
눈 뭉치와 함께 떨어져 나가 버렸다.
"야! 너 정말..."
화가 단단히 난 은태는 친구의 눈 집을 밟아 버리려는 마음으
로 일어섰다.
"야! 너 우리 반이지"
갑자기 들려온 가녀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모두들 놀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얼굴이 하얗게 생긴
여자아이가 조그만 남자아이와 함께 웃고 있었다.
"어! 너는… …"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은태의 눈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전 학 온지 얼마 안 되는 아이였다.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만으
로 남학생들이 괴롭혔던 아이였다.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
보던 자신의 모습이 은태의 눈 속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너. 지금 뭐하니"
멍하던 눈동자가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오며 부드러운 눈이 여
자아이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어! 눈 집을 짖고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지으
려고 하거든..."
"야! 재미있겠네. 내가 도와줄게. 그래도 괜찮지."
여자아이는 맑은 눈동자를 은태에게 응시하며 승낙하기를 바라
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그래 수진아. 그렇게 해."
"이야! 고마워 은태야. 우리 멋있게 만들어 보자. 수철아? 너도
어서 앉아서 만들어. 참! 얘는 내 동생이야."
수진은 동생과 함께 앉아서 은태가 만들고 있던 눈 집을 지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서서 지켜보는 은태의 가슴에서는
자신도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은태야? 어서 너도 앉아서 지어야지. 뭐하니."
열심히 만들고 있던 수진이가 고개를 들며 은태에게 말을 했
다.
"어! 어. 알았어."
서 있던 은태도 머뭇거리다가 앉아서 같이 만들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같이 만들던 친구들도 조금 전에 분위기와는 틀리게
조용히 만들기 시작했고 몇몇 친구들은 조잘거리고 있었다.
-3-
"여보?"
귀속을 파고들며 나를 부르는 소리에 머나먼 긴 터널을 다시 되
돌아 나오고 있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뭐하고 있어요. 누가 보면 바보인 줄 알겠어
요. 눈 다 쓸었으면 빨리 들어와서 식사나 해요. 아침 상 봐났어
요."
"저 아줌마가 누구지" 하는 생각이 잠깐 동안 내 머리 속에서
우왕좌왕 하다가 이내 현실을 깨우치며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
다.
"어! 금방 들어갈게. 아직 조금 남아서..."
"그럼 빨리 들어와요"
집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나와서 그런지, 아내는 심한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여편네 결혼한 후로는 너무 현실 속에만 매여 살아가며, 예
전에 자신 소망하던 그런 꿈들을 다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이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더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정해놓은 고정관념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이는 사람들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음속에 언제나 품고 있는 그 아이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
다. 꿈과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말하는 플로토닉 사랑,
이 세상에 존재하기 힘든 사랑이다. 어른이 되어 갈수록 욕구를
느끼게 될수록…
"어! 아저씨 아직까지 여기 있으세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란 내 눈은 동공이 조
금씩 커지고 있었다.
"수진아!"
분명히 그 아이였다. 어릴 적 같이 눈 집을 짓던 그 아이…
"아저씨 왜 이러세요."
놀란 눈으로 잡은 손을 빼내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적으로 나
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아가씨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미.. 미안해요. 아가씨, 잠시 내가 …… 정말로 미안해요."
조금씩 떨어지며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내 자신도 놀라서 가슴
이 두근거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목격자가 있나 찾아보았다.
다행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 아가씨는 놀랐는지 추워서 빨갛게 얼은 얼굴이 더욱더 빨갛
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추며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4-
아까 밖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신경이 쓰여서 미칠 것 만
같았다. 분명히 그 아이였다. 어릴 적 모습하고 너무나도 흡사한
그녀를 보면서 그 순간만큼은 수진이 라고 착각을 했었다. 그런
내가 미친놈처럼 생각이 들었다.
"휴"
한 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여보? 왜그래요.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어요."
"아냐! 그냥… 모르겠어"
아까 실수 한 것을 말 할 수는 없었다. 미친놈, 변태 취급을 받
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모르다니요.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하고 상의를 해야지요"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귀찮게 그러는 거야."
화를 내고 있었다. 내 마음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
다. 상위에 수저를 세게 내려놓고는 일어섰다.
"여보? 왜 그래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아내는 당황해 하고 있었다. 결혼하고서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기에 더욱더 눈동자가 크게 변해갔다.
그렇게 변해 가던 아내의 얼굴은 이내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고
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간 가슴이 찡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을
타는 것 같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흐느끼는 아내를 뒤로하고 대문 쪽으로 도망치듯 다가갔다. 굵
직한 손잡이를 잡아서 돌렸다.
-철컥-
차가운 바람이 문을 여는 틈새로 세차게 밀고 들어와서 내 얼
굴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 바람은 내 마음까지도 작살 내고 있
었다.
아내가 아까 하던 말이 자꾸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대 낮
에 귀신한테 홀린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내의 말 대로라면
분명히 홀린 것이리라.
"그 집이요. 어! 그 집은 아가씨가 없는데. 늙은 노부부 두분
많이 살고 있어요. 당신이 잘 못 본 거 아닌가요."
차가운 눈보라와 함께 아내의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져 가 버
렸다.
-휘이잉-
-삐리릭 삐리릭-
세찬 바람소리를 뚫고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대답하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은태야."
"어! 너 상태냐?"
오랜만에 듣는 친구 목소리였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다가
세상 밖으로 나가면서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였다.
"그래. 나 상태다. 간만에 통화하는 구나! 그 동안 잘 지냈냐?"
"그럼"
"야! 바쁘니까. 본론부터 말할게. 너 어릴 적에 같이 지내던 친
구 영호알지?"
"그럼. 당연히 알지 알고 말고 그런데 왜?"
"그 놈이 죽었데."
"뭐! 뭐라고?"
어둠 저편에 있던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놀란 내 가
슴이 진정 되기도 전에, 상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파고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 마주 오는 차와 정면 충돌을 해서 옆에 탄 사람
은 중상이고 상태와 상대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
했다더라.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이 있어."
상태의 목소리가 조금씩 흥분되어 가고 있었다.
"뭐가 이상한데?"
잠시 말이 없던 상태가 겨우 진정을 시켰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
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다. 상대방 차에 탓 던 사람들 말이다. 그 사람들..."
"응!"
자꾸 뜸을 들이는 게 더욱더 호기심에 빠지게 했다.
"그게 말이다. 니가 어릴 적 좋아하던 그 여자에 이름이 뭐더
라"
빙빙 도는 것이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분명히 상
태는 수진이를 말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수진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다시 되물었다.
"너…… 수진이를 말하는 거니?"
"맞아! 수진이. 그래 수진이 그 아이야. 예전 내가 좋아했던 수
진이가 상대편 차에 타고 있었다더라. 이거 우연 치고는 너무
심한거 아니니"
-우지직-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충전지와 함께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이 주저앉아 버린 내 머리 위
로 하얀 눈이, 나를 사정없이 내리 치고 있었다.
SUCHN.
구성 : 1995년 제대하기 얼마 전.
완성 : 2000년 2월 14일 어느 시.